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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침몰 원인과 최후

구다이mate 2023. 6. 2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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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컸던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는 그때까지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해양사고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인원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타이타닉 사건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ㅣ 타이타닉 침몰 원인

빙산과의 충돌 

이는 타이타닉 침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1912년 4월 14일 밤, 타이타닉호는 북대서양을 항해 중에 빙산과 충돌했습니다. 이 충돌로 인해 선체의 오른쪽 부분에 길이 300피트(91미터)에 이르는 금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바닷물이 내부로 새어 들어왔습니다.

선체 구조의 결함 

타이타닉호의 선체는 16개의 방수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는 일부 구획이 침수되더라도 배 전체가 가라앉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빙산과의 충돌로 인해 여러 구획이 동시에 침수되어서, 방수구획의 효과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구획이 완전히 철폐되지 않고 일정 높이 이상의 물이 차면 다른 구획으로 넘치는 설계였던 점도 침몰을 가속화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구명보트의 부족 

타이타닉호에는 생존 장비로서의 구명보트가 크게 부족했습니다. 선박은 2,2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울 수 있었지만, 구명보트는 전체 인원의 절반도 되지 않는 1,200명밖에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감시 및 경고 시스템의 실패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타이타닉호의 감시 및 경고 시스템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또한, 레이더나 소나와 같은 현대적인 탐지 장비가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선원들은 육안과 망원경만을 이용해 빙산을 감지해야 했습니다.

대응 계획의 부재 

타이타닉호의 승무원들은 큰 참사에 대비축해둔 계획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구명보트에 대한 훈련이나 탈출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많은 생명이 헛되이 잃어졌습니다. 승객들이 구명보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이 발생했고, 구명보트의 배치도 불균형적이었습니다.

속도 과다 

타이타닉호는 빠른 속도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빠른 속도로 인해 충돌로부터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빠른 속도로 인해 빙산에 대한 반응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즉, 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라디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타이타닉호는 빙산을 회피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주변 선박으로부터의 경고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타이타닉호가 처한 위기 상황을 주변에 알리는 데에도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통신의 실패는 구조 행동이 늦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기상 조건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 밤은 매우 평온했고, 바다는 거의 고요했습니다. 이로 인해 빙산을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보통 파도나 물살이 빙산 근처에서 깨어져 나오기 때문에 선원들은 그것을 통해 빙산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바다는 거의 완벽하게 고요했으므로 빙산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국제 빙산 특별경보제도의 부재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 이후, 해상 안전을 위한 국제적인 협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 중 하나가 바로 국제 빙산 특별경보제도(IBSFC)의 설립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북대서양 해역에 떠다니는 빙산에 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선박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이와 같은 참사를 방지하려고 했습니다.

선박의 과대 평가와 오만

타이타닉호는 "침몰할 수 없는 배"라는 미명 아래 건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승무원과 승객들 모두 배에 대한 과대평가와 오만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절대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위험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느렸습니다.

위의 이유들은 모두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기여한 원인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1,500명 이상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 대형 참사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참사는 선박 건축, 해상 안전, 그리고 긴급 상황 대응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이후의 선박 설계와 해상 안전 규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ㅣ 타이타닉호의 최후

 

심야의 어둠 속에서 12시 5분, 타이타닉호의 선장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총 16척의 구명보트와 4척의 접이식 구명정을 알려진 대로 준비하고, 승객들을 옮겨 태우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승객들은 구명보트로의 이동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첫 번째 구명보트에 탑승한 사람들은 겨우 13명에 불과했으며, 그중 남자 11명, 여자 2명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백만장자 3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중 한 명은 화이트스타라인의 고위직인 브루스 이즈메이였다.
그러나 금세, 타이타닉호가 왼쪽으로 불안하게 기울기 시작하면서, 승객들의 대기태세는 급격히 바뀌었다. 절망적으로 생명을 건진 승객들이 구명보트에 올라타려 애썼으나, 모든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 결과, 생존의 희망을 걸고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몸을 던졌으나, 최대로 태울 수 있는 수는 승객의 절반이었다.
재난이 초당처럼 닥쳐오는 상황에서, 수백 명의 승객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용기를 보였고, 어떤 이는 비겁함을 드러내었다. 희망과 절망, 두 감정이 교차하는 그 끔찍한 순간,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20세기 가장 감동적이고 끔찍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토머스 앤드루스, 타이타닉호의 주요 설계자였다. 그는 구명복을 입지 않고도, 주변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구명복을 입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성 승무원들에게 그는 부드럽게, "우리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대량의 공황을 일으킬 수 있으니, 우리의 사정을 널리 알리지 말아 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배의 하부가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로저 브리쿠를 비롯한 선상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은 쉴 틈 없이 찬송가를 연주했다. 그들은 배가 너무 기울어 서 있지 못할 때까지도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희생적인 행동을 한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편, 신부인 토머스 바일스는 승객들을 위해 고해성사를 거행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백여 명의 승객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존 제이콥 에스터, 유명한 부호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구명보트에 안전하게 태운 후, 직접 따라 타는 것을 거절당하자, 그는 경건하게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시도 슈트라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다도 끄떡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생존자는 이 두 부부가 구명보트의 자리를 제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아이다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하녀 엘렌 버드에게 자신의 외투를 건네면서, 그녀가 구명보트에서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이 부부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객실로 내려갔다.
비슷한 시간에, 부자인 벤자민 거겐하임과 그의 충성스러운 시종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구명복을 벗고 이브닝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새벽 2시 10분, 타이타닉호는 이제 두 동강이 나기 시작했다. 빙산과의 치명적인 충돌로부터 단지 2시간 2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새벽 2시 20분에, 타이타닉호는 마침내 바닷속으로 소멸했다. 새벽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구명보트 위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벽 3시 35분, RMS 캐퍼시아호가 재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이 배는 최종적으로 705명의 생존자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조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장 가까이에 위치했던 SS 캘리포니아호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자나 시신 중 어느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영하 2도의 극한의 추위에서 몇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 사상 최악의 참사를 조사하기 위해 각각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2,2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 중 약 1,500명이 이 참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 왜 구명보트는 그렇게 부족했을까요?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1만 톤 이상의 영국 배는 최소한 16척의 구명보트를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이 규정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16척의 구명보트로는 단지 약 1,200명밖에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승객의 안전을 우선시했다면, 승객을 1,200명 이상 탑승시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구명보트의 수용 인원이 1,20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700명 정도만 탑승한 것입니다. 거의 500석에 가까운 자리가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침몰 당시의 상황이 조금씩 해명되었습니다. 1등석 승객 중 63%, 2등석 승객 중 42%가 구명보트에 탔지만, 3등석 승객은 단지 25%만이 구명보트를 탔습니다. 몇몇 3등 승객은 철제 문과 방수벽에 의해 구명보트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로 인해 1등석과 2등석에 탄 아이들은 거의 모두 살아남았으나, 3등석에 있던 아이들의 3분의 2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 계급 차이와 안전에 대한 접근성 차이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ㅣ 타이타닉호의 근황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 15일에 침몰한 이후 70년 동안 대서양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 유명한 배의 잔해를 찾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 9월, 프랑스과학자 장-루이 미셸과 미국 해양사학자 로버트 발라드가 이끄는 미국-프랑스 공동 탐사팀이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들은 딥-시브 (Deep Sea Vehicle) '알빈'을 사용해 대서양 바닥 12,000피트 아래를 탐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의 탐사가 이루어져 많은 유물들이 수거되고 보존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 중 일부는 전시되어 공개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경매에 부쳐져 많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사와 유물 회수 작업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묘지 도굴'로 보고 유물 회수를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으며, 해양 보호 및 법적 문제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타이타닉호의 잔해는 계속해서 대서양 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양의 조건과 미생물의 활동으로 인해 배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약 30년 내에 타이타닉호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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